1. 여름이었다
이맘때쯤이면 왁자지껄하게 들려오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창문을 깨고 들어오는 햇빛은 교실의 소란까지 깨부숴놓았다. 아이들은 에어컨과 선풍기 밑에 몰려 옷자락을 펄럭였다. 네가 먼저네 내가 먼저네 하는 소리들을 들으면서, M은 숙제가 끝나지 않은 수학책을 얼굴 위에 덮은 채 의자에 뒤로 기대 있었다. 창밖으로 축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패스, 패스!
짜증 섞인 목소리들이 오가는 걸 듣자니 습한 공기가 돌연 폐를 찔러왔다. 저런 게 뭐가 재밌다고. 책을 덮어 책상 위로 던진 M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그 순간 우연히도, 창틀 사이로 S와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산란하던 햇빛이 허공에 박혔다. 느리게 땅 위로 떨어지는 골키퍼의 운동화, 골망을 흔들다 못해 잡아당기는 축구공. 튀는 땀방울과, 흙먼지와, 갑작스럽게 영혼을 끌어다 창공으로 집어던져버리는 저 맑은 눈동자.
S가 손을 흔들 때 M은 입을 틀어막고 창문 아래 푹 주저앉았다. 창문을 너무 늦게 닫았나. 장마가 온다더니 먹구름 한 덩이가 쫓아들어와 숨통에 박힌 느낌이었다. 습하고 답답한 것이 기분 나빠, M은 이 기분의 출처를 찾기 위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창문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밖을 보면 나이스 골이라며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S가 있었다. M은 그 허연 목덜미에서 답을 찾아내었다. 유리를 뚫고 들어온 햇빛이 폐를 몽땅 태우는 것만 같았다. 속에서 내린 빗줄기가 자꾸만 심장을 두드리면 그렇게 달고 간질간질한 냄새가 날 수 없었다. 아. M이 입을 벌렸다. 더운 숨이 창가 언저리로 퍼져나갔다.
어느 때보다 더운 여름이었다.
2.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단말이 진동했다. 보안회선으로 도착한 메시지가 이 이야기의 끝을 고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 의심은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제 지겨운 역할극은 끝인가?"
여느 때처럼 가벼운,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단말을 향해 있던 눈을 돌렸다. 동시에 무거운 금속음이 들렸다. 언젠가는 서로의 등을 지켰던 총구가 이제는 자신의 머리통을 향하고 있음을, 나는 소리를 듣기 전부터,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알고 있었으면 도망가지 그랬어."
"내가 왜?"
"너 좆밥이라 나 못 이기잖아."
"웃기고 있네, 그게 진짜 내 실력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그거 도발인가? 한 대 맞아주고 시작할 생각?"
탕!
첫발이 귀 옆을 스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탄이었다면 분명히 귓불이 찢기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제부턴 실탄이야. 알지?"
진심이구나. 깨닫자마자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 곧장 그의 발치에 대고 쏘았다. 탕! 공포탄이 방금 전과 같은 소리로 터지고, 두 개의 총구는 기어이 서로를 마주했다.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아니, 너만 죽는거야. 나까지 끌고 가지 말아줄래?"
그리고 두 번의 들숨과 날숨.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된 양, 타당! 하고 양쪽에서 총알이 동시에 쏘아져 나갔다. 공격이 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재빨리 구조물 뒤로 몸을 숨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몸을 숨기면 5초 내로 상대의 위치를 확인하니... 지금. 머리통이 보일 위치로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텅!
그러나 돌아온 소리는 완전한 헛발이었다. 어디 갔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뒤통수에서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겁쟁이 많이 컸네. 공격하고 무조건 피하기만 하던 녀석이."
"그거야 그쪽 룰에 맞춘 거고."
그는 방아쇠를 반쯤 당기고 있었다. 여기에서 무슨 짓을 해도 저 반절의 손짓보다 빠르진 못할 게 틀림없었다. 결국 총을 놓고는 양손을 들었다.
"항복이야."
시선을 올리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총구를 정확히 이마 한가운데 겨누고 있는 모습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항복이란 말에, 그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런다고 내가 봐줄 것 같아? 우리 쪽 룰, 알 텐데."
"알지. 반드시, 그리고 확실히-"
"-처리할 것."
방아쇠에 걸린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웃었다. 솔직히, 다행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이겼네. 축하한다."
"살다 보니 이렇게 칭찬도 받아보네."
"앞으론 뭐, 칭찬만 받겠냐?"
"승진도 하겠지."
빼돌린 정보가 든 usb가 그의 손에서 달랑거렸다. 우리는 그대로 한참을, 어쩌면 찰나를 흘려보냈다. 누구도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마지막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침묵을 깬 건 그의 쪽이었다.
"믿을진 몰라도 난 당신 꽤 좋아했어."
"다행이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날 좆같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했는데."
"물론 좆같지."
"개새끼가."
하하, 하는 웃음들이 섞일 동안, 나는 그가 우리 쪽에 처음 들어왔던 날을 떠올렸다. 그 풋풋함이 연기임을 진작에 알아봤더라면. 파트너로써 철저히 공적인 관계와 감정만을 유지했더라면. 하다 못해 그의 정체를 깨달은 날 망설이지 말고 상부에 보고했더라면. 후회뿐인 일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 나는 우리가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이 감정은 일방적인가, 혹은 쌍방향적인가. 답을 묻기가 무서워 나는 그저 눈을 감기로 했다.
"잘 살아라."
뒤로 기댄 몸뚱이가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그로부터 몇 초 후에, 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3. 아니, 널 무도회장에 데려다 줄 거야
짝짝! 손뼉 소리를 따라 문밖에서 치렁치렁한 의상과 보석들이 밀려들어왔다. 시타는 당황하여 제 주인을 올려다봤다.
"고... 공녀님, 이게 다 뭔가요!?"
분명 간단한 일이라고 해서 휴가도 미뤄두고 쫄래쫄래 따라왔는데! 방에 도착하자마자 몸을 씻기고 고급진 속옷을 입혀놓은 것에서부터 앞으로의 일이 절대 간단해 보이진 않았다. 완벽하게 옷을 갖춰 입은 공녀와 실크 속옷만 걸친 자신. 누가 봐도 저 치장단은 시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당황한 표정이 앞날을 예측하고 울상으로 바뀌어갈 때쯤, 공녀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 역시 저를 앞세워두고 또 땡땡이를 치시려는 거죠! 안 돼요 마마, 이번에도 수업에 빠지시면 공작님께서 경을 치실 거란 말이에요...!"
"쉿, 조용히 해! 밖에까지 들리잖니."
하얀 손가락이 입술을 꾹 눌렀다. 시타는 주인을 올려다보며 울상인 채로, 단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번 만큼은 안 된다! 총 19명 중 19명위 교사가 그녀를 포기했다. 저 공녀가 또 땡땡이를 쳐서 학원에서 쫓겨나게 된다면, 그날엔 자신까지 차가운 길바닥에 나앉게 되리라.
그러나 공녀는 싱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업은 갈 거란다. 나도 무작정 떼만 쓰진 않아, 시타."
"그럼 왜... 아, 혹시 저를 같이 데려가시려고요?"
공녀가 다니는 학원은 귀족 중 귀족만 다닐 수 있는 최고의 명문. 저 정도 차림이 아니라면 대문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쫓겨날 것이 명백했다.
"아니."
그러나 이번에도 공녀는 고개를 저었다. 칠흑 같은 흑발이 투명한 피부 위로 흘러내렸다. 자신과 같은 색이지만 너무나도 다른 흑색이 시타의 손에 닿았을 때, 공녀의 눈이 어여쁜 호선으로 휘어들었다.
"난 널 무도회장에 데려다 줄 거야."
4. 안단테는 자신의 얼굴 위로 눈물 흘리는 이의 얼굴을 볼 수 없음에 탄식했다.
안단테는 정신없이 뛰어가는 레프의 소리를 집요하게 쫓았다. 보이는 것이 없으니 저토록 뛰어가는 사람을 뒤쫓기란 매우 어려웠으나, 숨소리가 거칠어 겨우나마 따라잡을 수 있었다. 레프 역시 갈 길을 잃은 사람처럼 우왕좌왕하는 기색이 없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리에 굳은 것처럼 선 레프의 팔을 더듬어 손목을 붙잡았다.
"함정일 수도 있어요. 리흐테르는 큰 가문이라면서요? 하루아침에 그렇게 될 리가 없잖아요. 침착해요."
붙잡은 손목으로 떨림이 전해져왔다. 그 탓에 안단테는 마른침을 삼켰다. 누가 보더라도 그 가문은 레프의 모든 것이었다. 때문에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님을 알았지만, 그의 말대로 레프는 더욱 신중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이거 놔, 그러니까 확인하러 가겠다는 거 아니야."
"당신 혼자 가서 뭘 어쩌겠다고요."
잔인한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그 일이 만에 하나 사실이어도, 혹은 사실이 아니어도 그가 혼자 가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상대도 그만한 각오는 하고서 덤벼든 것일 테니까.
약간의 침묵. 그리고 이가 으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안단테는 잡고 있던 손이 자신을 강하게 뿌리치는 것을 느꼈다.
"함정이면 나만 희생하면 돼. 함정이 아니라면 다 죽일거야."
"안 돼요, 레프!"
그리고 열차의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단테는 급하게 그가 있던 방향으로 손을 뻗어 잡히는 것을 확 끌어당겼다. 으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무거운 몸이 그의 위로 떨어져내렸다.
"위험하잖아!"
"당신도 위험하다고요!"
"난 괜찮다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안단테는 레프가 또 뿌리치고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그를 꽉 끌어안았다.
"당신만 잘못되면 된다고요? 이러기 위해서 백사에 들어갔어요? 만약 이게 다 거짓말이고 당신이 그렇게 죽고 못 사는 그 사람이 지금 상황을 알게 된다면, ...제가 그 사람이면 지금의 당신을 그 어느 때보다 한심하게 볼 거예요."
되려 화난 듯한 목소리에 몸부림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주고 있던 힘을 풀자 위에서 비척대며 반쯤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로부터 한참, 몇 초는 더 흐른 뒤였다.
"...라냐가 죽었을 리가 없지?"
그 울음기 어린 목소리가 마치 부모님을 잃어버린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안단테는 선뜻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어느 쪽을 믿는데요?"
조용하던 중에, 쿨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울고 있었나? 레프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안단테는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레프, 하고 부른 직후 그의 뺨 위로 무언가가 투둑 떨어졌다.
그 순간 안단테는 자신의 얼굴 위로 눈물을 흘리는 이의 얼굴을 볼 수 없음에 탄식했다. 보인다면 손을 뻗어 멋지게 닦아주고 걱정 말라고 다독일 수 있었을 텐데. 대신에 그는 붙잡으라는 듯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기 때문에.
"...도와줄게요, 레프."
적이기 이전에 친우, 사지 아닌 사지에서 함께 뛰쳐나온 사이가 아니던가.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끝에 닿은 레프의 손을 붙잡았다.
"생각하는 방법이라도 있어?"
"아직이요. 계획을 세워봐야죠. 분명 정보가 있을 거예요. 백사부터 가볼까요?"
가장 믿음직한 곳이니까.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켰다. 그때서야 앞쪽에서 레프다운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안단테는 확실히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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