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 곤:붉은색은 그리움의 색이라지요. 근래 들어 그렇게나 선명하고 마음을 끄는 색이 또 없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지요. 분명 그리 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물음엔 답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는 곤의 목소리가 잘게 떨립니다.
어째서인지 자리에 못박힌 듯, 전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선우 곤:폐하께서는 동백이 무슨 꽃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동백의 선명한 붉음과 절도미를 칭송하곤 하지요.
동백이 지는 모양은 무엇과 닮았는지는 아십니까?
사람의 목이 잘려 떨어지는 꼴과 꼭 닮았답니다. 폐하께서 제가 오기 전 목을 치신 수많은 자들처럼요.
폐하께서는 죄가 아주 많은 분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새벽을 불러들였습니다. 반란군 새벽이요.
강 주란:뭐라고..?
두 눈동자가 떨렸다. 두 귀를 의심한다. 네가 그랬을리 없어..
선우 곤:오시는 길에 궁에 아무도 없지 않으시던가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이 궁 안에 폐하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폐하의 죗값을 치루실 차례입니다.
새벽이 와.
우리는 곧 죽어.
그럼 끝이 나는거야.
이번에도.
그러면 다음으로 넘어가는 거야.
스스로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나 자신의 목소리...
죗값을 치루라는 곤의 말과, 꿈속에서 나의 얼굴을 한 자들의 영문을 알 수 없는 말. 피부로 느껴지던
곤이 들려준, 아니, 겪었던 이야기들…
곤은 단순히 당신이 폭군으로서 목을 쳤던 자들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만이 당신의 죄가 아닙니다.
어쩌면.....
곤은 당신이 이전에 지었던 모든 죄들에 대해, 원죄에 대해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강 주란:"죗값이라니.. 난, 난 치룰 죗값같은 거 없어!"
선우 곤:그럼 궁 안에 떨어진 수많은 목은 누구의 손으로 쳐내린 목인가요. 또한 그동안 다른 이들이 흘렸던 피는... ..모두 폐하의 잘못입니다. 폐하가, 그리 하신 거예요.
모든 것이 폐하의 죄입니다.
강 주란:"그건.. 난 황제야. 그것들은 다 내 백성이고. 내 것을 어떻게 다루든 그게 왜 죄가 된다는 거야!"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락바락 외쳤다. 난 황제야.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존이었다. 그런데 내 행위가 죄라고? 애초에 죄라는 것이 어떻게 황제인 나와 함께 할 수 있단 말인가.
선우 곤:황제도 사람입니다. 폐하도... 언젠가는 사람이셨습니다. 수많은 시절들을 범인으로 지내셨어요. 기억은 나지 않으시겠지만.
(슬픈 표정. 그러나 말갛게 뜬 피곤한 웃음은 사랑으로 찬란했다. 그런 너였어도 나는 모든 날에 너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지금도.)
그리고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부디 깨달아주세요. 죄를 청산할 때입니다. 참회해야 합니다. 폐하도, 저도...
강 주란:"내가 범인이었다고?"
당연히 기억따위 날리 없었다.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지배자가 아닌 적이 없었다. 내 위의 사람이란 오로지 전대 황제인 내 아버지뿐이었다.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야. 새삼스러운 도덕이란 그랬다. 그러던 중 네 웃음에 묻어나는 사랑은 나를 숨막히게 했다. 넌 날 배신했잖아. 넌 날.. 날 사랑하지 않잖아.
"... 황제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건 없어. 그 어떤 것도! 백성 위에 군림하고 이 나라의 주인인 것이 황제인데! 내가 기억도 나지 않는 죄까지 인정하고 참회하라고?"
선우 곤:(내리깐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한 방울 뚝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물기 따윈 보이지 않았으나, 그럴 것처럼 보였다.)
폐하께선 전생과 내세를 믿으시나요. 믿지 않는다 하셔도 괜찮습니다. 전생은, 후생은, 정말로 있습니다.
...저를 사랑한다 하셨지요. 그 입으로 수천 번, 수만 번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사랑하신다고. 언제 어느 날이 오던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기억, 하세요? 아직도 그 말에 흐트러짐이 없다 단언하실 수 있으신가요?
강 주란: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동자에 가슴이 푹 주저앉았다. 왜 너가 그런 표정이야. 배신당한 건 난데. 너가 무슨 자격으로.
"...너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걸 물어. 나를 배신해 놓고! 나를, 나를 기만해 놓고 어떻게 그런 걸 물을 수 있어!! 나는 너를 사랑했는데, 너는.. 너는.. 모든 게 계략이었어. 네 향기로운 이야기, 음성, 눈동자 전부 다! 그 자리에 앉기 위한 거짓이었구나.. 내가, 내가 멍청하게.."
선우 곤:이 자리요...
(쓰디 쓴 음성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좌를 한 번 내려다보다가, 양손으로 쥐어 뜯어낼 듯 밀었다. 쿵. 육중한 소리를 내며 넘어진 옥좌가 초라하게 바닥을 뒹굴었다.)
이런 자리는 필요없습니다. 이곳에 앉기 위해 그 모든 걸 견뎌온 게 아니란 말이에요. 겨우 이딴 건...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괴로운 얼굴. 아픈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 손끝이 불안하게 덜덜 떨렸다.)
제가, 미우신가요. 더는 옆에 두고 싶지 않게 되셨나요.
강 주란:옥좌가 넘어지는 순간 울리는 육중한 소리에 움찔 놀랐다. 아니, 네 행동 자체에 놀랐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뭐하는 짓이냐 물을 겨를도 없이 네 이야기가 귀에 박혀들었다. 네 아픈 얼굴이 눈동자에 박혀들었다. 뭐야.. 이상해. 전부 이상하다고. 왜, 왜 너가.. 왜 너가 상처 입은 것처럼 구는 거야, 대체 왜.
"... 그럼 뭘 위해 날 배신했어?"
네 마지막 물음은 짜증과 울분 그리고 떨림이 치밀게 만들었다. 밉냐고? 밉기라도 하면 좋겠다. 이토록 원망스럽거늘 네가 밉지 않았다. 싫지 않았다. 네 지금 이 행동은, 날 팔아넘긴 행동은 죽도록 미웠지만, 선우곤 너를 곁에 두겠느냔 물음엔 주저없이 당연히 그럴 것이라 말할 것이었다.
"왜 날 배신했어!!"
아픈 건 나야. 나라고! 어린아이가 떼라도 쓰는 것처럼 발악하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왜 내 죄를 물어, 네가!
선우 곤:(외침 앞에서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양손바닥 뒤에서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가 가늘게 새어나왔다.)
... ...폐하를 위해서요. 전부, 페하를 위해서, 저는...
(왜 배신했냐고. 그를 속속들이 얘기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긴 밤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야.)
아주, 아주 오래전에, 까마득히 오래전에, 한 남자가 누군가를 살해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이야기. 손을 내리고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남자는 벌을 받게 됐어요. 신은 자신이 아끼던 이를 죽인 그 남자를 저주했습니다. 가장 비참한 생애의 반복 속에서 남자가 도망칠 수 있는 길은 없었어요. 그래서 남자의 연인은, 소원을 빌었습니다. 간곡하게 몇 날 며칠 동안을 빌었어요.
다행히 신은 일말의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천 번의 생이 지날 동안 자신의 시험을 통과하면 저주를 풀어주겠다, 그리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너를 보는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네가 아니라 다른 존재, 다른 먼 곳, 먼 시절을 보듯이 시선이 향한 끝점은 멀고 또 멀었다.)
남자의 연인은 남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비극을 항상 함께했어요. 어느 때도 그들의 사랑이 변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영원한 사랑이, 비극 속에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죽고. 또 죽고. 죽고. 죽어서. 마침내 한 나라 황제의 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유입니다.
(기어이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동시에 웃었다. 마치 모든 걸 털어놓고 시원해진 것처럼.)
다음 생으로 가야 해요.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폐하.
강 주란: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중간중간 아마도 할 말이 있었겠지만, 무언가로 붙여놓기라도 한 듯 벌어지지 않았다. 네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 내가, 누굴 죽였는데?"
"그때도 난 황제였어? 그래서, 죽인 거야?"
선우 곤:글쎄요, 누굴... 죽이셨던 걸까요.
(이제는 상관없어진 이야기였다. 이미 수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것이 누구였든간에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다만 폐하께서는.
...언젠가는 꽃을 아주 좋아하는 까칠하지만 따뜻한 이로. 또 언젠가는 병을 앓으면서도 굳센 청년으로. 화려한 걸 좋아해서 닥치는 대로 끌어모았던 대형 상단의 자제로. 제국의 모든 사람들과 척을 지고서도 꼿꼿했던 황가의 사람으로. 가난하지만 연인을 지키려 애쓰던 먼 이국 사람으로...
...고귀해도 가난해도, 모든 경우에 폐하는 폐하셨습니다.
강 주란:발악하던 몸과 얼굴에서 힘이 쭉 빠졌다. 여전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네 이야기는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이젠 그것을 넘어서 현실감조차 들지 않았다. 네 그 세치혀가 또 나를 꾀려하는 건가. 하지만...
"... 그럼 난 뭘 해야 하는 건데? 내가 뭘 하길 바라."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진실일지라도. 한을 품어 내 영원을 비틀어두었다는 신도 그저 우스웠다. 비참한 삶이라는 것이 권태에 못 이겨 백성의 모가지를 따는 황제의 삶이라니. 신은 비참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 새로운, 태양이 뜰 거야.. 낡은 태양이, 저물고.. 날 따라오지 마, 부디.."
선우 곤:사랑한다면 이런... 이런 결말이 아니라, 다음을 주셨어야지요. 제게 마지막 천 번째를 마저 채우게 해주셨어야지요...!
(원망 어린 울음소리가 절망스레 텅 비어버린 집무실을 울렸다. 닿은 손가락을 따라 뺨에 붉은 선이 생겨났다. 어쩔 줄 몰라 손으로 검이 꽂힌 주변을 눌러 잡지만 지혈은 되지 않고 붉음이 흘러넘친다. 한참을 순식간에 비대해진 좌절에 먹혀 주저앉아 있던 이는 이내 결심한 듯이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새 태양이 어디 있습니까. 태양은 오직 하나이기에 태양이라 하는데.
(꽂혀 있던 검날이 네가 더 아프지 않도록 신중한 각도로 느리게 빠져나간다.)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사랑해.
빠져나간 검날의 끝이 이번에는 곤의 목을 향합니다.
강 주란:칼날이 끝내 향하는 끝을 보고 어쩌면 난 네게 저무는 태양조차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한 천일의 밤. 해뜨기 전의 짙은 어둠. 그 밤이 나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 원죄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를 살해한 것보다도 가장 사랑하는 너를 영원한 밤에 가둬둔 것이라고. 눈물과 함께 멀어지는 의식탓에 흐려지는 눈으로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내가 너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