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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알로그/곤주란

[곤주란] 천생일야화千省一夜話 2020-02-14

 

KPC : 선우곤

PC : 강주란

 

 

 
千省一夜話 :: 천생일야화
 
*
 
궁에 밤이 찾아듭니다.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지자 하나둘 거리에 풍등이 켜지고, 궁에서도 노란 빛의 등이 서서히 걸립니다.
 
야간의 심부름꾼들이 등과 심부름거리를 가득 품고 분주히 뛰어다니는 와중에, 이곳의 가장 귀한 자의 거처는 조용하고 어둡기만 합니다.
 
새소리나 발자국 소리, 심지어는 공기마저 멈춘 듯한 공간입니다.
 
바람도 그 잔인함을 느낀 것일까요.
 
선선한 바람 한점 드나들지 않는 공간 안에서, 누군가 초에 불을 올립니다.
 
곤입니다.
 
이곳은 궁의 가장 내밀한 공간.
 
황제의 침실이라 하지요.
 
당신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지켜봅니다.
 
이내 불을 모두 올린 곤이 돌아와 당신의 옆에 앉습니다.
 
선우 곤:오늘은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폐하? 대신들이 폐하를 편치 않게 만든게 아니라면 좋을텐데 말이에요.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디어 판정
 
강 주란: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94
판정결과: 실패
 
그러고 보니 반란군에 관련한 시덥잖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요.
 
감히 황제의 절대성에 도전할 자가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강 주란:"반란군이니 뭐니 멍청한 소리를 들었어. 헛소리나 해대는 작자들.."
 
지루하고 뻔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온통 흥미로운 것들뿐이었다. 그런 네 이야기를 듣는 시간에서조차 멍청이들의 말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는 됐고, 오늘도 새로운 이야기 들려줘."
 
선우 곤:..그렇군요. 개의치 마세요.
(웃으며 손을 잡는다.)
침대에 누워보세요. 오늘도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강 주란:개의치 말란 말도, 오늘도 멋진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도 모두 마음에 쏙 들어서 마주어 웃음 지었다. 그래, 정무따위 알게 뭐야. 그런 건 재미없어. 한 손으로 네 손을 꼭 쥐고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기대감이 어린 눈동자로 너를 올려다 보았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야?"
 
선우 곤:(누운 몸 위로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이불 위에 손을 얹어 가만히 도닥인다.)
오늘의 이야기는 황실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하곤 목을 잠시 가다듬고,)
옛날예날에,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오래 전에, 어떤 황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
 
향초 때문일까요?
 
점점 졸음이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가물거리는 시야 너머로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리고, 결국 눈을 감습니다.
 
어째서인지 곤의 목소리가 오늘 따라 유독, 나직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뜬 곳은 전혀 모르는 어딘가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보이는 것은 무엇도 없는 허허벌판의 황무지입니다.
 
눈길이 겨우 닿는 지평선 너머에도 걸리는 것은 없습니다.
 
곤은 보이지 않습니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요?
 
그렇다기엔 발길이 스치는 모래와 거친 흙, 자갈의 느낌이 너무나 선명합니다.
 
이따금 보이는 온갖 동백과 벚꽃이 말라비틀어지고 시들어 널려 있습니다.
 
기묘한 느낌이 드는 공간입니다.
 
강 주란:"... 여긴 어디지..?"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꿈은 기억에 기반한다고 하지요.
 
이런 곳으로 시찰을 나왔던 경험은 없는데.
 
그렇더라도 우선은 무엇이라도 보일 때까지 걸어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강 주란:두리번거리면서도 천천히 걸음을 떼서 걷기 시작한다.
 
황무지를 걷습니다.
 
걷고, 걸어도 바람은 한 점 불지 않습니다.
 
정체된 공기가 느껴지지만, 어쩐지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아마도 꿈속이니 그런 것이겠죠.
 
그렇게 계속해서 걷다 보면, 저 멀리 한 오두막집이 보입니다.
 
허허벌판 속 폐허처럼 우둑하니 서 있는 유일한 오두막집은 마치 터져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여기저기가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습니다.
 
지어진 지 오래돼서인지 아니면 거친 손길을 탄 것인지, 외벽은 요철로 가득합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봐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법한 창문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이 황무지 만큼이나 낯선, 아니, 기억에 없으니 낯설어야 하는 공간임에도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군요.
 
온갖 기이하고 진귀한 것을 볼 수 있는 곳이 궁이라지만, 이런 곳은 그림으로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미묘한 익숙함이 전신을 타고 흐르는 걸까요?
 
집에는 문이 딱 하나 나 있습니다.
 
문은 입을 다문 것처럼 굳건하게 닫혀 있습니다.
 
자물쇠는 달려 있지 않으니 열어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강 주란:황량한 주위 못지 않게 황량하기 짝이 없는 집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곳을 봤을리 없는데.. 그럼에도 드는 기시감에 천천히 문을 열어본다.
 
자물쇠를 여는 순간, 집 안에서 갑작스레 무언가가 쏟아져 나옵니다.
 
강 주란:화들짝 놀라며 얼른 뒤로 물러나 살핀다.
 
민첩 판정
 
강 주란:
민첩
기준치: 40/20/8
굴림: 63
판정결과: 실패
 
잔뜩 쏟아져 나온 잡동사니에 깔립니다. 아프네요.
 
강 주란:"으... 이게 뭐야!"
 
버럭 성질을 내고 끙끙거리며 빠져나온다.
 
물건들의 무더기입니다. 뭔지 한 번 살펴볼 수 있겠어요.
 
강 주란:툴툴거리면서 대체 무엇이 날 공격한 것인지 살펴본다.
 
시들어빠진 수 개의 꽃무더기와, 글자가 새겨진 손수건, 몇 종류의 악세사리들을 비롯해 알아볼 수 없는 여러가지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외국의 것으로 보이거나, 국적조차 모르겠는 물건들도 보입니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걸까요?
 
살펴보는 것들 중에는 온갖 희귀한 것을 접해본 이 나라의 황제조차도 보지 못한 것들이 한가득입니다.
 
[꽃무더기/손수건/악세사리]
 
강 주란:"뭐지..? 이런 건 처음 봐."
 
얼떨떨하면서도 신기해서 악세사리를 집어 유심히 보았다. 온갖 진귀한 것들을 받아봤지만 이렇게 생겨먹은 건 처음 본다.
 
제국의 것은 아닌 듯 보이는 형태입니다.
 
금색 사슬을 엮어 동그랗고 납작한 문양이 새겨진 원반 형태가 달려 있는 아주 단순한 목걸이입니다.
 
관찰 판정
 
강 주란: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3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주 자그만 틈새 같은 것이 있습니다. 열어볼 수 있는 형태인 걸까요?
 
강 주란:어, 열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슬쩍 열어본다.
 
열어보니 안에서 재가 날라옵니다.
 
킁. 코에 들어간 것 같아요.
 
강 주란:"에.. 엣취!"
킁, 훌쩍..
얼굴을 구기며 코를 비비적 거리고 다시 재 말고 든 것은 없는지 본다.
 
사진이 있지만 너무 낡아 알아보기 힘든 형태네요.
 
강 주란:"뭐야.. 그냥 쓰레기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다가 뭔지 모르겠어서 툭 던져두고는 이번엔 손수건을 들어 살펴본다.
 
글자가 새겨진 손수건입니다.
 
손수건의 글자를 살펴도 알 수 없는 언어라는 사실만을 깨닫습니다.
 
근방 이국의 것이라면 눈에 익기라도 할텐데,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어라...
 
잘 살펴보니, 갈색의 변색된 것이 점점이 묻어 있습니다
 
강 주란:"응? 이건 뭐지..?"
 
설마 피인가? 이 와중에 나름 황제로서 혹독한(?) 공부를 했는데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어서 기분이 상한다.
꽃무더기는 또 뭐람. 손수건을 내려두고 이번엔 꽃들을 본다.
 
살펴보아도 그저 시든 꽃일 뿐입니다.
 
이국의 것으로 보입니다.
 
화병에 꽂는다 해도 살아나지는 않을 것 같군요.
 
강 주란:금새 흥미를 잃고 그마저도 툭 던져두었다. 전에 본 적 없다는 사실은 몹시도 흥미롭지만.. 삭막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안에 뭐가 더 있는 건가. 집 안에 흥미를 두고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
 
꽃을 던진 순간, 바람이 귀를 스치듯 지나갑니다.
 
너는 반드시 후회할 거야, 반드시…
 
...방금, 뭐였죠?
 
아주 작게 속삭이는 것처럼...
 
그냥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였을까요?
 
SAN(0/1)
 
강 주란: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60
판정결과: 보통 성공
"..뭐야."
 
기분 나쁘다는 기색으로 귀를 한 번 툭 털고 만다.
 
안으로 들어가 좀 더 둘러보지만,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잡동사니는 다 살펴본 것 같습니다.
 
손을 털고 일어나려 할 때쯤, 옆에 그림자가 와서 집니다.
 
강 주란:"응?"
 
얼른 몸을 일으켜 돌아본다.
 
곤입니다.
 
언제 온 것일까요?
 
그는 멍하니, 당신 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오두막을 바라봅니다.
 
강 주란:"곤!"
 
영 모를 곳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니, 그것도 너라서 얼굴 가득 화색을 띄었다.
 
"어디 갔던 거야. 너 여기가 어딘지 혹시 알아?"
 
그를 불러보지만, 대답은 없습니다.
 
수 초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꿈에서 깨어난 듯 당신에게로 고개를 돌립니다.
 
선우 곤:...이곳을 아시나요, 폐하?
 
강 주란:"응..? 아니? 모르겠는데. 그냥..."
 
어쩐지 익숙한 느낌은 들지만. 이런 폐허따위 황제인 내가 알 턱이 없었다.
 
"너도 모르는 곳이야? 아니, 그보다.. 너도 꿈이야?"
 
선우 곤:...글쎄요.
(설핏 웃는 모양새가 어쩐지 평소보다 흐릿하다.)
이 집에는, 아주 슬픈 이야기가 엮여 있어요. 그게 오늘 들려드릴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입니다.
 
강 주란:"... 그게 무슨 말이야?"
 
분명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잠들기 전 너와의 대화가 이어지는 것만 같아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이 꿈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럴리 없는데..? 꿈이 아니라면 난 어떻게 이런 곳에.. 너 역시도 내 꿈이 만들어낸 것일까?
 
"어.. 그러니까, 응. 그렇구나. 어떤 이야기길래?"
 
선우 곤:...
아주 먼 옛날 어떤 황제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황제는 그 연인을 아주 사랑해서, 연인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일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
 
그는 말을 잇다가 멈추고는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묻습니다.
 
선우 곤: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 같지 않으신가요?
 
강 주란: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려다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 내 이야기야?"
 
황제가 사랑하는 연인.
 
바라는 것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반드시 들어줄 존재.
 
당신은 곧, 이 이야기가 당신과 그를 아주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물음에 그가 웃으며 대답합니다.
 
선우 곤: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폐하십니다.
 
쿵.
 
실제로 들린 소리였을까요, 불안한 마음이 덜거덕 떨어지는 소리였을까요.
 
그와 동시에 세계가 암흑으로 변합니다.
 
무엇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눈을 감습니다.
 
눈을 뜨려 해도 난폭하리만치 무겁게 감겨오는 눈에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가엾지, 더할 나위 없이 가엾지.
 
기분 나쁜 목소리가 귓가를 타고 맴돕니다.
 
누구의 목소리였지?
 
도통 가늠할 수 없는 목소리와, 암흑으로 이지러지는 시야 새로, 당신은 오로지 단 하나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말을 내뱉은 곤의 얼굴이, 그토록 공허하고 슬퍼보였던 적이 없었다고.
 
...
 
다시 눈을 뜹니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옻향이 납니다.
 
고요한 공기 너머로 미세한 먼지가 날립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눈이 절로 휘둥그레 떠집니다.
 
나라의 가장 크다는 서고조차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요.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기는 거대한 책장과, 도저히 내용도 무엇도 짐작할 수 없을 듯한 빼곡히 늘어선 두터운 서책들과 죽편, 거친 삼베로 이뤄진 것부터 비단 두루마리로 낭랑히 들어찬 보관대까지,
 
이곳이야말로 지식의 보고라 불리기에 충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입니다.
 
도대체 이곳은 어디일까요?
 
아까의 꿈이 신경 쓰이지만, 이 서고는 그 누구라도 넋을 놓을 만큼 웅장하고 거대합니다.
 
강 주란:멍한 표정으로 서고를 둘러본다. 이런 곳은 본적은 커녕 이야기를 들은 적조차 없었다.
 
그때, 낱장의 서한이 팔랑팔랑 눈앞으로 떨어집니다.
 
강 주란:뭐지? 그것을 잡아 읽어본다.
 
잡아서 보니, 별다른 내용은 없고 오로지 일천 천 자만이 쓰여 있을 뿐입니다.
 
강 주란:"천..?"
 
의미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종이를 뒤집어도 본다.
 
뒤집어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어디서 날라온 것인지 모르겠네요.
 
천이라... 뭘까요?
 
그러고 보니 곤이 들려주겠다던 이야기.
 
그리고 천 번째의 밤.
 
그것과 관련된 것일까요?
 
강 주란:..이것도 꿈일까? 천 번째의 밤이 되니 나도 모르게 무언가 신경 쓰이는 것이라도 있던가.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종이를 내려두고 서재 안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꿈이라 할지라도 이런 곳엔 어떤 책이 있는지 궁금했다.
 
듣기 판정
 
강 주란:
듣기
기준치: 55/27/11
굴림: 93
판정결과: 실패
 
거대한 책장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저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보입니다.
 
곤이네요.
 
곤이 기다란 비단 두루마리에 붓으로 무언가를 적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강 주란:반가운 마음에 부르려다 마지막 네 얼굴이 떠올라 잠시 멈칫했다. 이내 고개를 털고는 너를 놀래켜줄까 하여 몰래 뒤로 슬금슬금 다가간다.
 
다가가며 보게 된 비단이 탁을 넘어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기다랗습니다.
 
빼곡하게 적힌 글씨는 역시 모두 곤의 서체입니다.
 
내용은 어째서인지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글씨를 자세히 살피려 해도 온통 흐릿하고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다행히 곤은 쓰는 데에 집중하고 있어 당신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네요.
 
강 주란:자연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비단을 유심히, 어떻게든 읽어보려고 노려보다가 이내 눈이 아플지경이라 포기하고 뒤에서 곤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당신의 팔이 닿자 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립니다.
 
황무지에서 봤던 그 서글픈 표정의 흔적은 찾을 수조차 없는 말끔하고 평범한 평소의 얼굴입니다.
 
선우 곤:폐하,
 
강 주란:"뭘 쓰고 있길래 내가 이렇게나 가까이 오는지도 몰랐어?"
 
허리를 꼭 안은 채 웃음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새로운 이야기라도 되는 거야?"
 
선우 곤:(부끄러운 듯 어색한 웃음이 스러진다.)
그런 셈이지요.
(붓을 잠시 놓고 가까이 있는 네 얼굴에 짧게 입을 맞춘다.)
이곳에서 폐하께 들려드렸던 이야기와 들려드릴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강 주란:네 입맞춤에 입가엔 더욱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다정한 네 말하며, 무엇보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 불안했던 내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 여전히 이곳이 어딘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어떤 이야기일지 기대되는 걸. 그럼 여긴 곤의 서재야? 이런 곳이 있는지 처음 알았어."
 
심리학 판정
 
강 주란:
심리학
기준치: 10/5/2
굴림: 58
판정결과: 실패
 
선우 곤:(말을 듣고는 주위를 길게 둘러본다. 둘러보는 표정에 옅은 미소가 떠 있어, 어쩐지 애정이 느껴져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동시에... ...)
저만의 비밀 공간입니다. 들어오신 분은 폐하가 처음이시네요.
 
강 주란:네 눈빛에 담긴 애정은 읽었지만, 또다른 감정은 알 수 없었다. 타인의 감정에 관심은 커녕 내 향락, 내 기분만을 살핀 세월이었기에 새삼 이렇게 누군가의 생각을 살피자니 그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었다. 네가 뭐든 솔직하게 말해준다면 좋을련만. 뭐든..
 
"내가 처음이라니 기분 좋네. 혹시 멋대로 들어와서 싫은 건 아니지?"
 
선우 곤: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쁜걸요.
(지금껏 이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쌓아왔다.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를 해온 것이다. 네 손을 덮어 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가, 손을 놓으며 널 제게서 떼어놓는다.)
아직 들려드릴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완성이 될 때까지 구경이라도 해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강 주란:"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야. 우물쭈물 뒷말은 얼버무렸다. 황제인 내가, 누군가의 눈치를 살핀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순순히 네게서 손을 거두고 둘러보라는 말에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응, 그래도 된다면야 사양 안 할게. 근데.. 읽을 수 있을진 모르겠어."
 
읽을 수 없었던, 지금도 늘어져 있는 비단의 글자를 보았다. 읽을 수 없는..
 
선우 곤:한 나라의 황제께서 글 읽는 방법을 잊으셨나요?
(농담처럼 말하며 웃는다. 한 곳을 가리키며,)
저쪽을 잘 찾아보시면 읽을 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가리킨 곳은 정리되지 않은, 혹은 빼어둔 것 같은 모양의 책 무더기였다.)
 
강 주란:"ㄱ, 그럴리가!"
 
네 농담에 얼굴이 대번 빨개졌다. 내가 먼저 꺼낸 말이니 불퉁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네가 가리킨 쪽을 보았다.
 
"저기 말고도 다 읽을 수 있어, 분명."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네가 가리킨 곳으로 성큼성큼 가서는 책을 뒤적인다.
 
당신을 보며 따뜻하게 웃음을 내보인 곤은 다시 붓을 들고 글자를 적기 시작합니다.
 
흩어진 책 무더기는 아무래도 양이 많으니,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은 몇 권 안될 것 같습니다.
 
관찰 판정
 
강 주란: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87
판정결과: 실패
 
이것저것 들춰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저기 있잖아. 읽어봐.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음성에 책무더기를 살펴보니 세 권 정도가 눈에 띕니다.
 
강 주란:목소리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홀린 듯 그 세 권으로 손을 뻗었다.
 
97권.
 
매일 자신의 연인을 위해 꽃다발을 들고 찾아갔던 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낯뜨거울 정도로 정열적이네요.
 
358권.
 
이 이야기는 이국의 것이로군요. 연회에 갔다가 실수로 바뀐 잔의 독을 마시고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입니다. 책 귀퉁이를 보니 종이가 울었다가 마른 것처럼 울퉁불퉁합니다.
 
952권.
 
역시 먼 이국의 이야기 입니다. 평범한 나날을 보내던 한 연인의 집에 원한을 품은 남자가 불을 질러 두 주인공이 죽는 내용입니다.
 
강 주란:흥미롭게 이야기들을 읽었다. 세 권 모두 연인에 대한 이야기네. 문득 네가 들려주었던 것들 모두 그랬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디어 판정
 
강 주란: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5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거,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나요?
 
분명 곤이 이전에 들려줬던 이야기들입니다.
 
이곳에서 읽은 이야기를 들려준 걸까요?
 
다 읽고 나니 책의 뒷편에서 무언가 떨어집니다.
 
강 주란:"응?"
 
뭔지 집어 확인해 본다.
 
동백꽃 한 송입니다.
 
강 주란:이게 왜 여기에 있지? 의아하게 보며 꽃을 돌려 이리저리 살펴본다.
 
붉디붉은 동백꽃입니다.
 
여느 동백이 그렇듯이 홀로 똑 떨어져나온 채 모양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강 주란:떨어진지 얼마되지 않은 것일까? 생생한 모양 그대로 갖추고 있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꽃이 떨어진 뒷편을 확인한다.
 
깔끔하게 잘려나간 단면입니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곤에게 보여주면 좋아할지도 모르겠어요.
 
강 주란:책은 내려두고 꽃을 들고 곤에게 돌아간다. 네게 도착할 즈음에 꽃을 든 손을 뒤로해 슬쩍 감추고는 네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선우 곤:(그제야 대강 마무리가 되었는지 붓을 놓곤 돌아본다.)
둘러보셨나요?
 
강 주란:"응, 나름? 그리고 이거 선물."
 
뒤에 감췄던 꽃을 짠 보여주며 웃음 지었다. 여기서 주웠으니 내 것이라 할 순 없지만, 뭐 어때. 아무튼 네게 줄 것이다.
 
선우 곤:선물이요?
(이전에도 몇 번 받은 적이 있어, 다만 이번에는 무엇을 주려 하는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밀어진 것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이어 눈에 들어온 것에,)
......
 
강 주란:"예쁘지? 동백꽃이야."
 
선우 곤:....네. 예쁘네요.
(웃음기 하나 없이 나지막하게 답하고는 꽃을 받아 든다.)
 
강 주란:어..? 네 반응이 영 기뻐하는 것 같이 않아서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것이 되려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나? 아니면 본래 네 것이었나?
 
"어.. 음, 잘 보관해."
 
어색하게 말을 덧붙였다.
 
선우 곤:..........
 
그리고 긴 침묵. 꽃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에는 기쁨이라곤 하나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강 주란:".. 혹시, 이 꽃을 싫어해..?"
 
긴 침묵 끝에 어렵사리 물었다. 이러니 눈치를 살피는 것만 같지만, 아니다. 그냥 확인하는 거야, 난.
 
선우 곤:..아뇨, 그저.. ...
 
강 주란:말이 이어지지 않자 괜히 더 애가 탔다. 너는 알기 어려운 사람이야.
 
"그저..?"
 
선우 곤:... ...폐하.
 
어렵사리 이어지던 목소리가 갈라짐과 동시에 곤의 시선이 당신을 향합니다.
 
선우 곤:죄의 값이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선우 곤:...오른팔을 걷어보세요, 폐하.
 
강 주란:죄의 값?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고. 하지만 네 음성이 어딘가 모르게 무거워서 의문의 말도 없이 쭈뼛거리면서도 오른팔을 걷어보였다.
 
오른팔을 걷으니 보이는 것은, 처음 서고를 들어왔을 때와 같은 서체로 쓰인 일천 천 자입니다.
 
SAN 0/1
 
강 주란: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49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게 뭐야?"
 
언제 이런 것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기묘한 기분이 전신을 스칩니다.
 
이건 무슨 뜻일까요?
 
기묘한 기분이 드는 순간, 곤이 쓰고 있던 서한의 내용이 눈에 들어옵니다.
 
강 주란:어...?
 
마지막 줄을 읽자마자, 서고의 천장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합니다.
 
강 주란:"배.. 반..?"
 
책장이 줄줄이 도미노처럼 쓰러져 내리고, 놓여 있던 두루마리들이 아래로 떨어져 흩어집니다.
 
쿵, 쿵, 쿵...
 
아수라장 속에서도, 다만 방금 읽은 그 두줄만이 뇌리에 박혀 떨어지지 않습니다.
 
배반, 배반이라니요.
 
배반이라니요…...
 
눈앞의 곤은 그저 무표정하게 당신을 바라볼 뿐입니다.
 
아무 말도 않고, 별다른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무기질한 눈으로,
 
다만 입으로는 웃으다만 입으로는 웃으면서.
 
다만 입으로는 웃으면서.
 
선우 곤:...저를, 사랑하시나요?
 
쿵,
 
소리와 함께 바로 옆에 있던 책장이 두 사람의 위로 무너집니다.
 
가득히 쌓아진 책장에서 쏟아지는 책과 서한들로 시야가 가려지고,
 
그토록 무기질하게 그를 쳐다보던 얼굴 역시 그 사이로 사라집니다.
 
온통 혼란한 곳을 벗어나려 해도 이미 무너져내리고 있는 서책의 무게에 짓눌릴 뿐입니다.
 
무거운가요?
 
고통스러운가요?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게 된 지 오래입니다.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만이 의식을 휘젓고, 빼앗습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강한 충격 속에서도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오는 이 목소리는,
 
절절하다 못해 무너질 것 같은,
 
그저 환청이라고 생각했던 그 목소리는…
 
" -사랑해. "
 
강주란, 자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입니다. 당신의 목소리요.
 
SAN 1/1d2
 
강 주란: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갑자기 시야가 환해지며 무언가가 눈앞을 스쳐 지나갑니다.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보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몇백을 훌쩍 넘는 사람들의 뒷모습입니다.
 
단지 뒷모습 뿐이지만,
 
누군가는 웃고 있고, 누군가는 슬피 울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대화를 하고…
 
마치 주르륵 놓인 그림을 보듯,
 
그렇게나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들 전부를 하나하나 관찰할 수 있음과 동시에, 전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기묘한 느낌이에요. 마치 사람의 인생을 단숨에 읽어내리는 것처럼.
 
...주마등처럼.
 
그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온전히요.
 
아이디어 판정
 
강 주란: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1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아.
 
알아냈습니다. 그들이 누군지요.
 
이전에 곤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의 주인공입니다.
 
꼭 책 속의 이야기가 눈앞에 구현된 것 마냥…
 
그러나 들었던 이야기 이상으로 눈앞에 보이는 것은 구체적이고 명확합니다.
 
깨닫는 순간,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립니다.
 
수천 개의 눈이 당신을 향하자 그제야 마주하게 된 것은
 
선명하게 보이는 그들의 얼굴은 모두...
 
당신입니다.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더 젊고, 더 늙었고, 복장도 머리도 지금의 당신과 같은 것이라곤 없지만,
 
그럼에도 분명합니다.
 
그들은... 강주란, 본인이에요.
 
SAN 1d2/1d2+1
 
강 주란:
SAN Roll
기준치: 69/34/13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rolling 1d2
 
(
1
 
)
 
 
=
1
 
:당신 때문이에요.
 
누군가가 앞으로 나섭니다.
 
:너는 죗값을 치뤄야 해.
 
누군가가 속삭이고,
 
:이건 이야기 따위가 아니야.
 
누군가는 비웃고,
 
:이건 인과야. 너는 벗어날 수 없어. 네가 저지른 일이니까. 죄의 값을 치뤄. 네 죄를, 네 죄를, 네 죄를, 네 죄를, 네 죄의 값을....
치룰 시간이다.
 
강 주란:"죄? 내 죄라고? 나는 죄따위 없어!!"
 
모두가 당신을 향해 소리칩니다. 그 모든 당신이, 당신을 향해.
 
그리하여 당신은
 
마침내 진실에 도달하게 되는 겁니다.
 
아니에요.
 
죄가 없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익숙함들은 단순히 들어본 이야기이기에 느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니에요.
 
곤이 해준 모든 이야기들은 전부,
 
전부,
 
겪어본 이야기입니다.
 
강주란, 당신이 곤과 함께요.
 
SAN 1d3/1d3+1
 
강 주란:
SAN Roll
기준치: 68/34/13
굴림: 62
판정결과: 보통 성공
rolling 1d3
 
(
1
 
)
 
 
=
1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며 모든 환상이 사라집니다.
 
사위가 순식간에 까맣게 변하고,
 
눈을 감습니다.
 
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요..
 
:‘잊지 마세요.’
‘당신의 원죄를 기억해내요.’
‘그것만이 이 비극을 끝낼 유일한 길이니까…’
 
...
 
시야가 점멸하는 순간, 침상에서 눈을 뜹니다.
 
식은땀이 아직 마르지 않아 조금 서늘한 것도 같습니다.
 
희미한 향초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창문 너머로는 아주 미미한 빛이 새어들어옵니다.
 
종이 울리는 소리를 보아하니 지금은 오전 4시.
 
아직 날이 밝기 전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곤은 보이지 않습니다.
 
침대는 잠들 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방을 잠시 둘러볼 수 있겠네요.
 
강 주란:불안정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꿈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배반, 원죄. 그 두 음절들이 맴돈다. 고개를 몇 번이고 털고서 방을 둘러본다.
 
그건 꿈일까요? 아니면 현실?
 
애매한 경계선 안에 들어갔다 온 기분입니다.
 
[침대/창문가]
 
강 주란:꿈일 거야. 꿈이어야 해.. 중얼거리며 창가를 보았다.
 
약간의 빛이 새어들어오는 것만 제외하고는 평범해보이는 창문입니다.
 
잠깐, 조금 어수선한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희미하군요.
 
강 주란:무슨 소리지..? 귀를 기울인다.
 
무슨 소리인지는 너무 멀고 작아 잘 모르겠습니다.
 
강 주란:혹시 보일까 싶어 창밖을 내다본다.
 
눈길이 닿는 곳까지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강 주란:"... 중요한 건 아니겠지."
 
중얼거리곤 홀로 앉아 있는 침대를 본다.
 
금 세공이 된 화려한 침대입니다.
 
비단과 너울이 넘실거립니다.
 
침대 위는 잠들기 전과 동일해 보입니다.
 
관찰 판정
 
강 주란: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32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침대 아래에서 곤이 떨어뜨리고 간 팔찌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어제 곤이 이곳에 왔던 게 아무래도 어제 곤이 이곳에 왔던 게 꿈은 아닌 모양입니다.
 
강 주란:그것을 집어 들어 새삼스럽게 살펴보았다.
"그럼.. 이야기를 들려주러 오긴 했구나.."
갖다줘야겠지. 잘 챙겨두었다.
 
듣기 판정
 
강 주란:
듣기
기준치: 55/27/11
굴림: 87
판정결과: 실패
 
복도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나다가 사라집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침대 옆에는 불이 꺼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향초가 놓여 있습니다.
 
수면을 돕는 용도인 것 같습니다.
 
아이디어 판정
 
강 주란: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99
판정결과: 실패
 
어쩐지 낯선 향이 나는 것 같네요.
 
강 주란:".. 원래 이런 향초를 피웠었나?"
의문스러운 눈으로 향초를 집어들고 이리저리 보았다. 그러고보니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곧장 잠들었던 것 같은데..
 
이전에 맡아본 적이 없는 향이네요.
 
이런 건 대부분 곤이 관리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강 주란:...지난 밤에 누가 이 향을 피웠었지? 어제도 곤이었나? 꿈 속에서 말한 배반, 그 단어와 함께 묘연한 기분이 들었다. .. 아니야, 뭔가.. 착오가 있는 거겠지. 느릿하게 향초를 내려두었다.
 
그나저나 황제가 기침했는데 아무도 들여다 보러 오는 사람이 없군요.
 
이상하게 궁 안도 매우 조용합니다.
 
강 주란:뒤숭숭한 꿈으로 가뜩이나 개운치 않은데 상황마저 평소와 다르니 기분이 더욱 바닥을 쳤다. 다들 정신머리가 빠졌나.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누구에게라도 화풀이할 요량으로 방문을 연다.
 
문을 열고 내다봤지만 궁 안이 빈 듯, 아까의 희미한 소리를 제외하면 어떤 인기척이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황제의 궁에 황제를 보필할 자가 없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누구라도 발견한다면 따끔히 혼을 내야겠지요.
 
이것도 꿈이 아니라면요.
 
강 주란:"... 뭐야. 다들 어딜 간 거야. 호위마저 감히 황제의 방을 팽개친 건가?"
 
기가 찰 노릇이라고 생각하며 성큼성큼 사람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드는 기묘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되려 더 평소보다 발을 구르며 걷는다.
 
그나저나 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지난 밤들 동안 그가 당신의 곁을 비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난 밤들 동안 그가 당신의 곁을 비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잠시 나갔다기엔, 어딘가 계속 분위기가 이상하지 않았던가요.
 
강 주란:".. 게 아무도 없느냐! 곤!! 곤은 어디 있지!"
 
나 홀로 기침하게 두다니! 괘씸하기도 하지! 발을 구르면서도 조금 불안하게 떨리는 시선으로 평소와 몹시도 다른 궁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곤, 곤은 어디에 있지?
 
아이디어 판정
 
강 주란: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1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생각해보니 곤은 이따금 당신의 집무실 뒤뜰을 거니는 걸 좋아했었죠.
 
혹시 거기에 있는 건 아닐까요?
 
강 주란:혹시 싶어 빠른 걸음으로 뒤뜰로 향한다. 어느새 걸음은 급해져 반쯤 뛰다시피한다.
 
자신을 따르는 이가 아무도 없음에 생소함을 느끼며 자신을 따르는 이가 아무도 없음에 생소함을 느끼며 뒤뜰로 향합니다.
 
집무실로 가는 길에도 궁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로 텅 비기라도 한 것처럼, 인기척 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집무실 근처에 도착하자... 어라?
 
황제의 집무실에서 빛이 새어나옵니다.
 
이 시간에, 대체 누가?
 

결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닌데 말이에요.

 
혹시, 곤이 아닐까요?
 
강 주란:의문스럽고 괘씸하고, 하지만 동시에 드디어 인적을 찾은 것인가 혹 그것이 곤인가 싶어 조금은 달갑게 집무실로 향해 문을 열었다.
 
"곤, 너야?"
 
집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놓인 바닥입니다.
 
아득한 향이 코끝을 스치며 마음을 흩습니다.
 
이게 대체 몇 송이인지, 셀 수도 없습니다.
 
한 발을 딛자, 신 아래로 부드럽게 동백이 짓이겨집니다.
 
동백이 이어지는 곳을 따라가면...
 
중앙의 옥좌. 금상.
 
그리고 거기에 앉은 곤이, 눈에 들어옵니다.
 
강 주란:"... 곤아? 거기서, 무얼하고 있는 거야..?"
 
선우 곤:붉은색은 그리움의 색이라지요. 근래 들어 그렇게나 선명하고 마음을 끄는 색이 또 없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지요. 분명 그리 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물음엔 답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는 곤의 목소리가 잘게 떨립니다.

 
어째서인지 자리에 못박힌 듯, 전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선우 곤:폐하께서는 동백이 무슨 꽃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동백의 선명한 붉음과 절도미를 칭송하곤 하지요.
동백이 지는 모양은 무엇과 닮았는지는 아십니까?
사람의 목이 잘려 떨어지는 꼴과 꼭 닮았답니다. 폐하께서 제가 오기 전 목을 치신 수많은 자들처럼요.
폐하께서는 죄가 아주 많은 분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새벽을 불러들였습니다. 반란군 새벽이요.
 
강 주란:뭐라고..?
두 눈동자가 떨렸다. 두 귀를 의심한다. 네가 그랬을리 없어..
 
선우 곤:오시는 길에 궁에 아무도 없지 않으시던가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이 궁 안에 폐하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폐하의 죗값을 치루실 차례입니다.
 
새벽이 와.
 
우리는 곧 죽어.
 
그럼 끝이 나는거야.
 
이번에도.
 
그러면 다음으로 넘어가는 거야.

 
스스로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나 자신의 목소리...
 
죗값을 치루라는 곤의 말과, 꿈속에서 나의 얼굴을 한 자들의 영문을 알 수 없는 말. 피부로 느껴지던
 
곤이 들려준, 아니, 겪었던 이야기들…
 
곤은 단순히 당신이 폭군으로서 목을 쳤던 자들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만이 당신의 죄가 아닙니다.
 
어쩌면.....
 
곤은 당신이 이전에 지었던 모든 죄들에 대해, 원죄에 대해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강 주란:"죗값이라니.. 난, 난 치룰 죗값같은 거 없어!"
 
선우 곤:그럼 궁 안에 떨어진 수많은 목은 누구의 손으로 쳐내린 목인가요. 또한 그동안 다른 이들이 흘렸던 피는... ..모두 폐하의 잘못입니다. 폐하가, 그리 하신 거예요.
모든 것이 폐하의 죄입니다.
 
강 주란:"그건.. 난 황제야. 그것들은 다 내 백성이고. 내 것을 어떻게 다루든 그게 왜 죄가 된다는 거야!"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락바락 외쳤다. 난 황제야.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존이었다. 그런데 내 행위가 죄라고? 애초에 죄라는 것이 어떻게 황제인 나와 함께 할 수 있단 말인가.
 
선우 곤:황제도 사람입니다. 폐하도... 언젠가는 사람이셨습니다. 수많은 시절들을 범인으로 지내셨어요. 기억은 나지 않으시겠지만.
(슬픈 표정. 그러나 말갛게 뜬 피곤한 웃음은 사랑으로 찬란했다. 그런 너였어도 나는 모든 날에 너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지금도.)
그리고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부디 깨달아주세요. 죄를 청산할 때입니다. 참회해야 합니다. 폐하도, 저도...
 
강 주란:"내가 범인이었다고?"
 
당연히 기억따위 날리 없었다.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지배자가 아닌 적이 없었다. 내 위의 사람이란 오로지 전대 황제인 내 아버지뿐이었다.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야. 새삼스러운 도덕이란 그랬다. 그러던 중 네 웃음에 묻어나는 사랑은 나를 숨막히게 했다. 넌 날 배신했잖아. 넌 날.. 날 사랑하지 않잖아.
 
"... 황제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건 없어. 그 어떤 것도! 백성 위에 군림하고 이 나라의 주인인 것이 황제인데! 내가 기억도 나지 않는 죄까지 인정하고 참회하라고?"
 
선우 곤:(내리깐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한 방울 뚝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물기 따윈 보이지 않았으나, 그럴 것처럼 보였다.)
폐하께선 전생과 내세를 믿으시나요. 믿지 않는다 하셔도 괜찮습니다. 전생은, 후생은, 정말로 있습니다.
...저를 사랑한다 하셨지요. 그 입으로 수천 번, 수만 번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사랑하신다고. 언제 어느 날이 오던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기억, 하세요? 아직도 그 말에 흐트러짐이 없다 단언하실 수 있으신가요?
 
강 주란: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동자에 가슴이 푹 주저앉았다. 왜 너가 그런 표정이야. 배신당한 건 난데. 너가 무슨 자격으로.
 
"...너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걸 물어. 나를 배신해 놓고! 나를, 나를 기만해 놓고 어떻게 그런 걸 물을 수 있어!! 나는 너를 사랑했는데, 너는.. 너는.. 모든 게 계략이었어. 네 향기로운 이야기, 음성, 눈동자 전부 다! 그 자리에 앉기 위한 거짓이었구나.. 내가, 내가 멍청하게.."
 
선우 곤:이 자리요...
(쓰디 쓴 음성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좌를 한 번 내려다보다가, 양손으로 쥐어 뜯어낼 듯 밀었다. 쿵. 육중한 소리를 내며 넘어진 옥좌가 초라하게 바닥을 뒹굴었다.)
이런 자리는 필요없습니다. 이곳에 앉기 위해 그 모든 걸 견뎌온 게 아니란 말이에요. 겨우 이딴 건...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괴로운 얼굴. 아픈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 손끝이 불안하게 덜덜 떨렸다.)
제가, 미우신가요. 더는 옆에 두고 싶지 않게 되셨나요.
 
강 주란:옥좌가 넘어지는 순간 울리는 육중한 소리에 움찔 놀랐다. 아니, 네 행동 자체에 놀랐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뭐하는 짓이냐 물을 겨를도 없이 네 이야기가 귀에 박혀들었다. 네 아픈 얼굴이 눈동자에 박혀들었다. 뭐야.. 이상해. 전부 이상하다고. 왜, 왜 너가.. 왜 너가 상처 입은 것처럼 구는 거야, 대체 왜.
 
"... 그럼 뭘 위해 날 배신했어?"
 
네 마지막 물음은 짜증과 울분 그리고 떨림이 치밀게 만들었다. 밉냐고? 밉기라도 하면 좋겠다. 이토록 원망스럽거늘 네가 밉지 않았다. 싫지 않았다. 네 지금 이 행동은, 날 팔아넘긴 행동은 죽도록 미웠지만, 선우곤 너를 곁에 두겠느냔 물음엔 주저없이 당연히 그럴 것이라 말할 것이었다.
 
"왜 날 배신했어!!"
 
아픈 건 나야. 나라고! 어린아이가 떼라도 쓰는 것처럼 발악하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왜 내 죄를 물어, 네가!
 
선우 곤:(외침 앞에서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양손바닥 뒤에서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가 가늘게 새어나왔다.)
... ...폐하를 위해서요. 전부, 페하를 위해서, 저는...
(왜 배신했냐고. 그를 속속들이 얘기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긴 밤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야.)
아주, 아주 오래전에, 까마득히 오래전에, 한 남자가 누군가를 살해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이야기. 손을 내리고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남자는 벌을 받게 됐어요. 신은 자신이 아끼던 이를 죽인 그 남자를 저주했습니다. 가장 비참한 생애의 반복 속에서 남자가 도망칠 수 있는 길은 없었어요. 그래서 남자의 연인은, 소원을 빌었습니다. 간곡하게 몇 날 며칠 동안을 빌었어요.
다행히 신은 일말의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천 번의 생이 지날 동안 자신의 시험을 통과하면 저주를 풀어주겠다, 그리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너를 보는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네가 아니라 다른 존재, 다른 먼 곳, 먼 시절을 보듯이 시선이 향한 끝점은 멀고 또 멀었다.)
남자의 연인은 남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비극을 항상 함께했어요. 어느 때도 그들의 사랑이 변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영원한 사랑이, 비극 속에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죽고. 또 죽고. 죽고. 죽어서. 마침내 한 나라 황제의 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유입니다.
(기어이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동시에 웃었다. 마치 모든 걸 털어놓고 시원해진 것처럼.)
다음 생으로 가야 해요.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폐하.
 
강 주란: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중간중간 아마도 할 말이 있었겠지만, 무언가로 붙여놓기라도 한 듯 벌어지지 않았다. 네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 내가, 누굴 죽였는데?"
"그때도 난 황제였어? 그래서, 죽인 거야?"
 
선우 곤:글쎄요, 누굴... 죽이셨던 걸까요.
(이제는 상관없어진 이야기였다. 이미 수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것이 누구였든간에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다만 폐하께서는.
...언젠가는 꽃을 아주 좋아하는 까칠하지만 따뜻한 이로. 또 언젠가는 병을 앓으면서도 굳센 청년으로. 화려한 걸 좋아해서 닥치는 대로 끌어모았던 대형 상단의 자제로. 제국의 모든 사람들과 척을 지고서도 꼿꼿했던 황가의 사람으로. 가난하지만 연인을 지키려 애쓰던 먼 이국 사람으로...
...고귀해도 가난해도, 모든 경우에 폐하는 폐하셨습니다.
 
강 주란:발악하던 몸과 얼굴에서 힘이 쭉 빠졌다. 여전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네 이야기는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이젠 그것을 넘어서 현실감조차 들지 않았다. 네 그 세치혀가 또 나를 꾀려하는 건가. 하지만...
 
"... 그럼 난 뭘 해야 하는 건데? 내가 뭘 하길 바라."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진실일지라도. 한을 품어 내 영원을 비틀어두었다는 신도 그저 우스웠다. 비참한 삶이라는 것이 권태에 못 이겨 백성의 모가지를 따는 황제의 삶이라니. 신은 비참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 말해 봐, 선우 곤. 내가 뭘 하면 되겠어."
 
기묘하게도 음성이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선우 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옥좌가 있던 단상에서 내려와 당신의 손에 검을 쥐여줍니다.
 
그러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여전히 꼼짝도 할 수가 없습니다.
 
곤이 무릎을 꿇고는 목을 한껏 젖히며 당신을 올려다보자 덜덜 떨리는 목울대가 선연히 보입니다.
 
선우 곤:저를 사랑하십니까.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십니까, 폐하.
그럼 마무리를 지으십시오..
그들이, '새벽'이 오기 전에 이 이야기의 끝을 내어주십시오.
이번 생에서 당신의 손으로 목을 친 수많은 동백처럼.
이제 다음 장으로 넘어가야 하잖아요.
 
그리고 웃습니다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인데, 눈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간절한 열망, 소원…
 
무엇으로 보아도, 곤은 지금 진심으로 그리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강 주란:아, 그래.. 이것이구나. 이게 네가 말한 그 신의 복수야. 치졸하기 그지없어.
"천 생일이 지나도록 기회를 얻어내지 못하면 나는, 너는 어찌 되는 것이지?"
 
선우 곤:(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아마 답은 그 웃음에서 이미 나왔을 것이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그 웃음에서. 나를 내버려두지 말라는 듯한 그 웃음에서.)
...책장을 넘겨주세요, 폐하. 다시 천 권의 책을 쓰고 싶진 않습니다. 이제 그만 끝을 내주세요. 결말을 결정하는 건 온전히 폐하십니다.
 
강 주란:물끄러미 너를 내려다 보았다.
 
".. 삶이라는 것이 곤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네가 말해 봐. 신의 손바닥 안에서 구르는 장기말임에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어? 모든 비참함을 끌어안고 있던 상황에서도 말이야."
 
선우 곤:(약간의 침묵 끝에.)
적어도,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보단 가치 있는 것이었어.
 
강 주란:".. 미묘한 대답이네. 그럼 서로를 지킬 수 없는 삶엔 무슨 의미가 있지?"
 
중얼거리며 검날을 손끝으로 느릿하게 훑었다.
 
선우 곤:..나와 함께했던 날들이 즐겁지 않았어? 나를 지키지 못해서, 나를 만난 걸 후회해? 나를 사랑하게 된 걸... 후회하는 거야?
 
강 주란:"..아니. 네가 날 사랑하게 허락한 걸 후회해. 그 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한 걸 후회해. 넌 나를 사랑하면 안 됐어."
 
모질게 말했다.
 
"네 삶의 의미가 나였어선 안 됐어."
 
네 어리석음을 꾸짖었다. 넌 죄인을 사랑해선 안 됐다. 이렇게 내 앞에 무릎 꿇고 있어선 안 됐어.
 
선우 곤:그건 네 잘못이 아냐. 네 책임이 아니야. 폐하는 잘못이 없으십니다.
(선택한 건 나였으므로, 멋대로 소원을 빌어서라도 너를 구하자고 다짐한 건 나였기에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약삭빠른 마음이 안심을 했다.)
저를 사랑하시죠? 당신을 사랑하는 절 사랑하시잖아요. 무엇을 망설이세요. 간단한 일을 미루지 마십시오. ..보세요. 새벽이 옵니다, 폐하.
 
강 주란:".. 그래, 새벽이 오네. .. 새로운 태양이 뜰 거야."
 
손을 뻗어 네 뺨을 느릿하게 쓸었다. 이내 네 눈 위를 부드럽게 덮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
 
네 눈을 덮은 채 칼날 끝을 내 심장 위로 겨누고 그대로 힘껏 밀어넣었다. 숨과 함께 비명, 신음을 참았다.
".. 사랑하느냐고 물었지, 곤아."
"네가... 바라는 것 하나 없을 때."
"난 늘 그 생각을 하였다."
"... 내 심장을, 꺼내 보여주면... 너는 알 것인가 하는.."
"곤아, 넌.. 날 사랑하니?"
 
사랑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답을 하며 떠올린 눈이 제 안에 당신을 비춥니다.
 
놀란 눈이 크게 뜨이고,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난 곤이 당신의 몸을 받쳐 안습니다.
 
선우 곤:...어째서요, 폐하, 주란아, 어째서...
 
강 주란:당연한 물음을 한다며 웃었다.
 
"...사랑하니까."
 
힘 빠진 몸이 네게 기대 안겼다. 옅게 피가 묻어난 손이 네 뺨을 쓸었다.
 
"... 새로운, 태양이 뜰 거야.. 낡은 태양이, 저물고.. 날 따라오지 마, 부디.."
 
선우 곤:사랑한다면 이런... 이런 결말이 아니라, 다음을 주셨어야지요. 제게 마지막 천 번째를 마저 채우게 해주셨어야지요...!
(원망 어린 울음소리가 절망스레 텅 비어버린 집무실을 울렸다. 닿은 손가락을 따라 뺨에 붉은 선이 생겨났다. 어쩔 줄 몰라 손으로 검이 꽂힌 주변을 눌러 잡지만 지혈은 되지 않고 붉음이 흘러넘친다. 한참을 순식간에 비대해진 좌절에 먹혀 주저앉아 있던 이는 이내 결심한 듯이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새 태양이 어디 있습니까. 태양은 오직 하나이기에 태양이라 하는데.
(꽂혀 있던 검날이 네가 더 아프지 않도록 신중한 각도로 느리게 빠져나간다.)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사랑해.
 
빠져나간 검날의 끝이 이번에는 곤의 목을 향합니다.
 
강 주란:칼날이 끝내 향하는 끝을 보고 어쩌면 난 네게 저무는 태양조차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한 천일의 밤. 해뜨기 전의 짙은 어둠. 그 밤이 나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 원죄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를 살해한 것보다도 가장 사랑하는 너를 영원한 밤에 가둬둔 것이라고. 눈물과 함께 멀어지는 의식탓에 흐려지는 눈으로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내가 너의 밤이었다.
 
같이 갈까요?
 
이번에도, 그리 할까요?
 
예전에도 이랬나?
 
묻지 못한 물음이 묻힙니다.
 
검을 내지르는 것은 한순간이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은 함께 쓰러집니다.
 
한 점 화폭처럼, 흐드러진 동백이 탐욕스럽게 그 피를 머금고 더욱 붉게 물듭니다.
 
숨을 멈출 듯 강렬하게 떠돌던 향에 알싸한 것이 함께 감돕니다.
 
고요한 와중에 들리는 것은 여직 들리는 심장소리 뿐.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스치는 것도 같지만,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끝. 새로운 시작.
 
다만 미련도 무엇도 없는 그 눈만이, 그 시선만이 속삭입니다.
 
안녕. 작별이에요.
 
다시 만나요
 
오래 걸리지 않을거예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내가 당신을,
 
당신을...
 
다음의 다음,
 
또 그 다음의 다음의 다음,
 
그리고 그 다음의 다음의 다음까지도.
 
당신을 만나러 가겠다고.
 
Ending 3
 
KPC, 탐사자 로스트